[특집 보도자료] 정렬공 최윤덕 將相 동상 제막식 거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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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보도자료] 정렬공 최윤덕 將相 동상 제막식 거행
기사입력 2010-11-12 16:44   최종편집 경남우리신문
작성자 경남우리신문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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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이 낳은 역사적인 인물 최윤덕 장상이 600여 년의 역사를 거슬러 창원에서 다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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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윤덕 장상 제막식     © 경남우리신문편집국

창원시는 12일 오후 3시 시청 옆 창원광장 변에서 박완수 시장을 비롯해 김이수 창원시의회 의장과 유원석 부의장을 비롯한 시의원, 김형봉 창원시 화합및균형발전시민협의회 회장, 최용규 장상문중 부회장, 박동백 동상건립 자문위원장을 비롯한 자문위원, 임영선․조성화․김홍규 동상건립 참여작가, 엄성도 창원시노인회장, 언론인, 기업인, 기관단체장, 학생, 시민 등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 초기(태조~세종시대) 국가적 대업을 이룩한  ‘정렬공 최윤덕 장상’(貞烈公 崔潤德 將相) 동상의 제막식을 거행했다.
 
창원시는 이에 앞서 오전 10시 북면 소재 최윤덕 장상 묘소에서 제례를 올리고 동상 건립을 고했다.
 
600년 창원 역사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창원이 낳은 위대한 인물의 재조명을 통해 후대에 귀감으로 삼도록 하고자 함은 물론, 통합 창원시의 역사발전에 새로운 시금석으로 삼기 위해 기마상 형태로 제작된 최윤덕 장상의 동상은 길이 7.8m×높이 6.5m의 브론즈(3종 최고급) 6톤으로 국내 최대 규모이며, 좌대 높이만도 6m×폭 4.3m의 화강석으로 벽면에는 취지문(별첨1), 한반도 지도(별첨2), 장상의 연보(별첨3)를 함께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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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윤덕 장상 제막식     ©경남우리신문편집국
 
최윤덕 장상의 동상은 그 위상에 걸맞게 예술적 우수성을 나타내기 위해 역동적이고 패기 넘치게 디자인 했으며, 역사성과 시대성을 감안해 좌대는 성벽의 모티브로 디자인 했다. 또 동상은 활 쏘는 형태로 말머리를 옆으로 하여 동상의 얼굴이 가리지 않게 제작했으며, 야간에도 동상의 늠름한 위상과 자태를 느낄 수 있도록 야간조명을 설치해 색다른 야경을 연출했다.
 
한편, 최윤덕 장상의 동상 건립에는 조선초기의 복식과 부장품 등에 관한 전문가로 구성된 11명의 자문위원회(자문위원장 박동백, 명단 별첨4)가 공식적인 회의만 9차례 이상 가졌으며, 국내 조각 전문가로서 유명 작가 4명(명단 별첨5)도 참여한 가운데 세한기획이 시공하고, 하도홍 작가가 제작한 이 동상은 창원시가 8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역사적인 인물에 대한 재평가와 함께 시민들의 자긍심 고취는 물론, 최윤덕 장상 동상 조형물의 예술성을 가장 잘 표현한 명품 동상이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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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덕 장상이 걸어온 길
 최윤덕 장상은 조선 초 최고의 무장으로 여진과 왜구를 물리친 영웅이었다. 그는 1376년(고려 우왕2년) 창원시 북면 내곡리 무릉촌에서 아버지 최운해 장군과 창원이씨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4남 중 장남이었다. 눈에 푸른 광채를 띄고 태어난 최윤덕은 열세 살 때 화살촉 하나로 호랑이를 잡았을 정도로 기골이 장대하였다. 당대 최고의 석학인 권근 문하에서 학문과 무술을 익혀 19세(태조 3년, 1394년)무과 화시에 장원급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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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1419년(세종원년) 세종이 왕위에 오르자 왜구의 침범이 빈발하였다. 조선은 수차례에 걸쳐 유화교린책을 썼으나 말을 듣지 않자 세종은 왜구를 섬멸할 생각을 굳혔다. 대마도 정벌이 조선의 승리로 끝이 나고, 전장에서 돌아왔으나 최윤덕은 곧장 여진족 정벌에 나가게 되었다. 장군의 눈은 호안으로 무섭게 보여 남을 대할 때 항상 눈을 감고 이야기 했으며, 장군의 무서운 눈매를 보고 두려워 여진족이 되돌아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또한 1428년(세종 10년) 병조판서에 임명된 최윤덕은 “전하, 요소요소에다가 성을 쌓아 국방을 튼튼히 하여야 하옵니다”라며 북방은 야인족에 대비해 산성을, 삼남은 왜구에 대비해 읍성 축조를 건의했다. 이에 세종은 “최윤덕 그대는 틈만 나면 성을 쌓자고 하니 이제부터 경을 축성대감이라고 불러야겠소” 라며 축성대감이라는 별호를 붙여주었다. 이는 율곡 이이선생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년 전에 십만 양병설로 왜국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140년 전에 이미 왜국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아울러, 1433년(세종 15년) 4월 평안도 절제사 최윤덕을 총사령관으로 파저강(압록강의 중국쪽 지루)유역에 진을 친 여진족을 치려고 출정하였다. 그 결과 최윤덕의 노력으로 여연(閭延)·자성(慈城)·무창(茂昌)·우예(虞芮)의 4군이 설치되었다. 이리하여 압록강의 상류 지역까지가 조선의 영토로 편입된 것이다. 이후 여진의 침입은 잠잠해졌다.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변방이 소란하여 도안무사로 다시 평안도에 가서 진무하니 출장입상(出將入相) 곧 나가서는 장수가 되고 조정에 들어오면 대신으로서 장상(將相)이 되었다. 이후 무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우의정, 좌의정에까지 이르렀으나 그의 생활은 참으로 청백리였으며, 인격적으로 원만한 분이셨다. 또한 장군은 정승의 몸으로도 그의 고향 창원을 자주 찾았으며 그의 목소리가 남달라 서울로 가면서 집에 두고 온 물건이 있으면 8㎞정도 떨어진 낙동강 나루에서 고함을 지르면 집의 종이 듣고 달려갔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최윤덕 장상과 관련한 특별한 사연도 있다. 장상이 고향인 창원을 내려오면서 말 한필 비서관 한명만 데리고 오다 문경에서 지방사또들이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을 그냥 통과하니 무례한 놈이라고 비서관을 잡아 매질하려다 정승임을 알고 창원 북면까지 찾아와 사죄한 일화도 전해진다. 이러한 인연인지는 모르지만 최윤덕 장상은 현재 문경 산북면 소야리에서 성황신으로 신격화되어 모셔지고 있으며, 동상 제작과정에서도 얼굴을 완성하자 동상이 갑자기 흔들리는 현상이 나타나 장상의 영험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한편, 최윤덕 장상을 모시고 있는 곳은 서울 종묘에는 위패가, 전북 장수군과 전남 해남에는 사당이,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는 영정이 모셔지고 있다.
 
 
◈세상에 빛 못 본 정렬공 최윤덕 장상의 숨은 비사
◇ 오늘날 국가 영토의 기틀을 잡은 위인 최윤덕
우리는 인물을 논할 때  모든 공을 한 사람에게 돌리는 경향이 있어서 그 외의 인물들은 제외 되거나 그늘에 가리어지는 잘못을 저지르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사에서는 활발한 사람의 움직임이 없다는 평도 있다. 그런데 근년에 이르러 우리의 역사를 재평가하고 역사상의 인물의 업적들을 깊이 연구하게 됨에 따라 여러 인물들이 새로운 평가를 받는 것도 사실이다.
 
최윤덕이란 인물에 대해서 한국사 교과서와 개설 책에서는, 세종 때에 압록강 상류 여연에 침입한 오랑캐의 추장인 이만주를 토벌하고 성을 쌓아 자성군을 두어 4군 설치의 기초를 만든 인물이라고 한 두 줄로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그가 대마도 정벌 때에 삼군도절제사가 되어 원정군을 지휘하였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최윤덕은 조선조에서 무인 출신으로 좌의정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는 조선 왕조 초기인 태종과 세종 때에 무인으로서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와 북방에서는 여진족을 토벌하여 국가의 기틀을 잡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 조선실록 전체에서 2번 밖에 안 나온 임금의 칭찬
임금이 신하에게 제갈공명과 같다고 칭찬한 것은 조선 실록에서 두 번밖에 없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영의정 류성룡이 사직서를 내자 이 난국은 제갈공명도 타개하지 못하였을 것이라며 류성룡을 칭찬하였고, 세종은 최윤덕에게 항상 “나의 제갈공명”이라고 하였다. 최윤덕이 좌의정에 올랐을 때에 대신들은 “영의정을 시켜도 마땅합니다.” 라고 하였지만 그는 국사를 경영하고 음양을 조화시키는 일은 무신이 간여할 바가 아니오며, “신을 국방의 임무에만 머무르게 하소서“라며 사양하였다. 그는 “무인은 군무에만 충실하고 국정에는 간여하지 않아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가 소위 음양을 조화시키는 정치를 할 줄 몰라서가 아니었음은 물론이었을 것이다. 그의 발길은 8도 어느 곳에나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지방의 수령으로서 선정을 베풀고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따라서 조선왕조 500년에서 가장 찬란한 위업을 달성한 세종 조에서 민족의 대업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도 밖으로 국방을 튼튼하게 받쳐주는 최윤덕이 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라는 점은 누구나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축성대감’의 별호가 붙은 사연
‘축성대감’이라는 별호는 이렇게 탄생했다. 세종이 “윤덕은 나를 만나면 반드시 성을 쌓을 것을 말한다”라고 할 만큼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축성을 강조하여 “축성대감“이라는 별호를 내렸다고 한다. 그의 축성 이론은 야인과 왜구를 토벌한 실전의 경험과 우리나라 지세를 이용하려는 전략에 의해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고려의 수당 대군을 격파한 것은 산성이었고, 고려군이 몽고군을 격퇴한 것도 산성이었다. 조선왕조는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비로소 대대적으로 성을 수축하였는데 최윤덕의 선견지명이 어느 정도였는지 이 사실만으로도 알 수 있다.
 
◇ 장상이 된 사연
1433년 세종대왕은 평안도 도절제사인 최윤덕을 판중추원사 영영변도호부사 삼군장수로 임명하고 1만 5000명의 군사로 작전계획이 적중하여 하루 만에 대승하였다. 파저강(압록강 북쪽) 승보를 접하고 세종대왕은 다시 최윤덕을 우의정에 제수하였으나 변방이 소란하여 도안무사로 다시 평안도에 가서 오랑케를 평정하게 하니 조정에 들어오면 정승이요 전쟁에 나가면 장군이라 출장입상(出將入相 나가면 장수 들어오면 정승)으로 장상(將相)이 되었다.

◇ 씩씩하고 굳세며 용기와 지혜의 자질
세종 6년 59세에 좌의정에 오를 때 세종은 “경은 연전에는 여위고 약하더니 금년에는 살이 오르고 윤택하니 내가 매우 기쁘다”고 하였다. 또 세종 17년 60세 때 좌의정의 사직소에 대한 세종의 비답에 “경은 씩씩하고 굳세며 용기와 지혜의 자질과 성품을 타고 났으며, 화락하고 단아하며 자애롭고 찬찬한 덕을 품었다”고 하였다. “신은 침식을 할 때에도 오히려 변방방비의 일을 생각합니다” 하였으니 항상 사고하는 상이였다고 본다.
 
◇ 전쟁 승리의 필수품 말(馬 )관리
옛날 전쟁에 있어 말은 엄청난 기동성을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말을 사육하고 이를 보유하는 것은 한 나라의 국방에 있어서 전략상 지극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조에는 중국의 왕조들이 말의 진상을 요구하여 오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이런 저런 까닭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지방과 큰 섬에 목장을 설치하고 목마관을 두어 말을 관리하게 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목장이 제주도와 강화도였다.
 
세종 8년 에 최윤덕은 정 2품직인 사복제조(사복제조: 말에 관한 일로 그 우두머리가 아닌 사람이 그 관아의 벼슬을 맡아 봄)에 임명되었다.

8월 8일에 임금은 사복제조 최윤덕, 병조판서 이발, 참찬 이천, 지신사 곽존중, 이대운, 김맹성 등을 어전으로 불러 다음과 같이 명하였다. “ 이제부터 각도의 여러 섬에 있는 목장의 말을 겨울철에 각 고을에 옮겨 나누어 사양하는 것을 폐지하고 그대로 놓아두고 겨울을 지내게 하는 일과 들풀을 모아서 쌓아 두는 일에 대하여 편리한지 아닌지를 논의하라고 지시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차가운 겨울철이 되기 전에 섬에 있는 말을 육지로 옮겨 사육하다가 봄이 되면 다시 섬으로 옮기고 있었다. 그것은 실로 번거로운 일이었다. 수군과 배가 동원되어야 하고 많은 인부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세종이 이러한 번거로움을 덜고 마정(馬政)의 실질적인 효과를 가져오고자 했던 것이다. 다시 최윤덕 등이 의논하여 아뢰었다. 

“그대로 놓아기르면 육지로 옮겨 나누어 기르는 폐단은 없사오나 경상·전라도 등의 지대는 겨울철에도 몹시 춥지 않기 때문에 목장의 말들이 풀을 얻을 수 있사오나 나머지 지방은 겨울이 되면 말이 굶어 죽을 수 있는 상황이 될 것이니 경상 전라를 제외하고는 모름지기 목자와 모든 섬 근처에  있는 船軍으로 하여금 풀을 베어서 축적하여 겨울을 날 준비를 해 놓고 우선 시험하고서”  세종은 말을 육지로 옮기는 번거로움과 겨울철의 목초를 걱정한 것이었고, 최윤덕은 그 대책을 아뢴 것이다.
 
사복시에서 제조는 최고의 관직으로 특별히 둔 직분이었으며, 보통 때는 정 3품인 사복시정이 우두머리로  일을 맡아 보았으니, 세종이 얼마나 馬政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최윤덕은 임금의 특별한 뜻에 호응하기 위하여 여가 있을 때 마다 목장을 찾았다. 어미 말을 따르는 망아지가 때로는 어미 곁을 떠나 목장 안을 달리는 것을 볼 때 최윤덕은 눈을 가늘게 뜨고 크게 웃었다. “저 놈이 크면 나라를 지키는데 큰 역할을 할 것이다” 그는 말을 돌보는 자를 불러 말했다. “말을 잘 보살펴 주어라. 말도 사람과 같이 자기를 돌봐주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니라”
 
◇ 최윤덕 장상을 모신 곳
  정렬공 최윤덕 장상을 모시고 있는 곳은 다음과 같다. 서울 종묘에는 위패가, 전북 장수군과  전남 해남에는 사당이,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는 영정이 모셔지고 있다. 문경군 산북면 소야리에는 성황당에 마을 수호신으로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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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중추원사 정렬공 최윤덕 장상 연보

 一三七六(고려 우왕二)년 양장공 최운해 장군과 정숙부인 창원이씨 사이의 장남으로 창원시 의창구 북면 내곡리 一○九六번지 속칭 정승골에서 출생하였다. (경상남도 기념물 제一四五호)
▲양촌 권근 문하에서 학문을 익히고, 어려서부터 궁시에 능하여 화제가 되었다.
▲一三九六년 二十一세 때 경상도 병마도절제사인 아버지 진영에 출전하여 영해의 반포에 침략한 왜적을 활로 쏴 연이어 대승했다
▲一四○○년 태종이 역마로 불러 반포의 전투 상황을 듣고 훈련관에 사진할 것을 명하고 이튿날 부사직(副司直 정5품)에 임명하였다
▲一四○二년 낭장에 올라 대호군(大護軍 정3품)에 임명되고 대과에 응시하려 했으나 태종이 전투에 출전케 하여 돌아오니 방 끝에 합격시켰음을 부끄럽게 여겨 1410년 다시 대과에 응시 합격하였다
▲ 一四○四년 부친 양장공이 별세 상중에 태종이 기복(起復)되어 임지로 부임하였다
▲一四○八년 의창과 회원이 통합되어 창원(昌原) 지명 시원(始原)의 해가 되었다.
▲一四一○년 경성병마사로 임명되니 여진족 동맹가첩목아 등이 최윤덕의 활솜씨에 감복하고 퇴각하였다
▲ 一四一五년 영길도 도순문찰리사로 고쳐 제수하고 다시 우군총제에 임명되었다
▲ 一四一八년 중군 도총제에 임명하고 이듬해인 세종원년에 의정부 참찬(정二품)으로 승진하였다
▲ 一四一九(세종一)년 대마도를 칠 때 태종은 유정현을 삼군도통사 최윤덕을 삼군절제사로 삼아 가서 독려하게 하였다. 공은 사전에 내이포의 왜인을 분산시키고 평망고 등 포악한 자를 목 베어 대마도와의 정보 누설을 차단하였다. 토벌하고 돌아와 유정현이 태종에게 “최윤덕은 운주(運籌)함이 기이하고 절묘하여 전승에 적중하였습니다.” 하니 태종은 “경은 그를 아는 것이 늦었다.” 하였다
▲ 一四二一년 공조판서에 임명되니 왜의 보복에 대비 축성을 주청하였다
▲ 一四二三년 평안도 절제사 겸 안주목사에 임명되어 선정을 베풀고 관아 밖에 채소를 손수 가꾸어 농본정책 모범을 실현하였다
▲ 一四二八년 병조판서로 옮기고 축성을 강조 북방 야인족에 대비 산성을 삼남은 왜인에 대비 읍성 등을 강조하고 이듬해에 도순찰사가 되어 성기(城基)를 살펴 정하였다
▲ 一四二九년 병선에 안정위주의 대형보다 왜선을 잡기 위해 속도가 빠른 중맹선을 주청하였다
▲一四三一년 일본이 지금은 저희들끼리 싸우고 있지만 통일이 되면 반드시 우리나라로 침입할 것이므로 그때에는 동래로 올 것이니 그곳에 성을 쌓아야 합니다 하였는데 그로부터 140여년 후 그의 예언은 적중하였다.
▲ 一四三二년 파저강 여진족 이만주가 여연에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로 국경을 소란케 하였다.
▲ 一四三三년 평안도 도절제사인 공을 판중추원사 영영변도호부사 삼군장수로 임명 ▲1만 5천 군사로 작전계획이 적중하여 하루 만에 대승하였다. 파저강 승보를 접하고 우의정에 제수하였으나 변방이 소란하여 도안무사로 다시 평안도에 가서 진무하니 출장입상(出將入相 나가면 장수 들어오면 정승)으로 장상(將相)이 되다
▲一四三四년 경강사수색(京江司水色)에서 거북선의 일종인 동자갑선(冬字甲船) 왕자갑선(往字甲船) 제작시 세종은 최윤덕의 자문에 의해 배위에 거북등과 같이 뚜껑을 덮고 위는 쇠못 밑에는 나무못 반반으로 무게가 一천 八백근 속도는 중인데 쓸만하다 하여 설계 도서를 작성 전국에 배포하였다. 같은 해 무장이 의정(議政)에 관여할 수 없음을 아뢰고 전문을 올려 의정을 사면코자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이듬해 좌의정으로 승진 하였다.
▲ 一四三六년 초대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로 승진하였다.
▲ 一四四四년 七十세에 가까워 사직소를 올렸으나 윤허되지 않다.
▲ 一四四五(세종二七)년 궤장(几杖)을 받기 위해 관대하고 당하에서 배수하고 돌아와 유명(遺命)을 “장례는 검소하게 하라”하고 돌아가니 나이 70세였다. 세종은 부고를 접하고 조회를 삼일간 폐하고 예관을 명하여 관에서 장사지내는데 장지는 창원시 의창구 북면 대산리 산 四八번지 어머니 묘소 곁에 안장되었다.(경상남도 기념물 제121호)
 시호를 정렬(貞烈)이라 하였으니 청백하게 절개를 지킨 것이 정(貞)이요 공이 있어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열(烈)이다.
▲ 一四五○(문종 즉위)년 세종묘(世宗廟) 배향신(配享臣) 1번에 선정되다.
▲ 一四五三(단종一 )년 실록에 평하길 최윤덕은 관홍간정(寬弘簡淨)하고 솔직하여 거짓이 없으며 여러 번 정벌을 전담하였으나 추호도 법을 범함이 없었고 사졸(士卒)과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같이하여 한때의 명장이 되었으며 또 경사(經史)를 섭렵하고 매양 양장(良將)의 사업에 권권(拳拳)하였다고 하였다.
 
창원성 동문 밖에 충신 최상국(崔相國) 정려(旌閭)를 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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