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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 선후배 101명을 표로 만들어 진술한 이해찬씨
국민은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진실을 알권리가 있다
기사입력 2019-05-15 22:12   최종편집 경남우리신문
작성자 안기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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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철 의원이 14일 오후3시 10분 자신이 운영하는 페이스북을 통해 "동료 선후배 101명을 표로 만들어 진술한 이해찬씨"라는 제목으로 합수부 진술과 피의자신문조서를 공개했다.

 

심 의원은 "본 의원에 6일 앞서 6월 24일 체포된 민청협 위원장대리 이해찬은 277쪽 합수부 진술과 4회 피의자신문조서를 통해 본 의원의 혐의에 대해 상세 진술(000403, 000405, 000418, 000424쪽)하고 본 의원에 하루 앞선 공판에서 거의 모든 공소사실을 시인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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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 선후배 101명을 표로 만들어 진술한 이해찬씨     ©e시사우리신문 편집국

다음은 페이스북에 게재한 전문이다.

 

이해찬씨는 진술서에서 1.26. 김대중씨와의 면담, 4.26.경 김홍일과의 개별 만남 등 김대중씨 관련 진술 3회를 비롯해, 3.25.부터 5.16.까지 16회에 걸쳐 이◯범을, 조◯우를 만나 가두시위를 지시받고, 5.8. 민청협 확대간부회의에서 “유혈사태를 감수하고 4.19와 같은 학생시위로 김대중을 옹립하기로 결의”했다고 진술했다. 또 5.10. “(심재철에게) 4·19같은 반정부 투쟁으로 가두시위를 가열시켜 정부공공기관을 점거하고 정부가 전복되면 국민연합이 과도임시내각이 될 것이며, 돌멩이, 각목, 화염병을 준비하도록 학생회에 전했다”고 진술했다. 그의 진술서에는 국민연합 공동의장이며 전 대통령 후보인 김대중씨 밑으로 국민연합, 국민연합 밑으로 민청협이 그려진 도표까지 있었다. 특히 이해찬씨는 “제가 본건을 위해 접촉한 인물들과의 관계를 작성하였다”라며 민청협 회원, 복학생, 재학생등을 구분해 학생운동과 관련된 선후배 동료들의 전과, 직책, 주요 활동 등을 구체적으로 적시한 A4용지 7쪽짜리 101명의 명단을 표로 작성해 제출했다.

 

유시민의 90쪽 서울대 학생운동권 상세지도와 같은 진술서와 함께 이해찬의 277쪽 자필 진술서는 신군부의 학생시위를 통한 내란음모 조작에 일조를 했다. 이해찬씨가 합수부에 제출한 101명 리스트는 민청협 회원 48명과, 유시민이 지켰다고 해명한 서울대 비밀조직원 2명, 각 대학 복학생 리더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명단 중 7명은 나중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피고인이 되었고 4명은 검찰측 증인과 참고인이 되어 법정에서 동 사건 유죄를 입증했다. 특히 합수부는 이 중 이해찬씨가 김홍일씨 만날 때 데려갔다는 친구의 이름에 동그라미를 쳤고 이 사람은 나중 검찰이 증인청구해 증거의 요지로 판시된다.

 

합수부 1차 진술(6.26)에서 김대중씨의 국민연합의 시위개입, 민청협 등 복학생들의 재학생 시위교사, 폭력시위 모의 등 모든 혐의사실을 인정하고 다른 101명 동료들의 혐의들을 상세히 제출한 이해찬씨는 ‘김대중씨 측근 그룹 17명 + 측근그룹의 사주를 받은 민청협 회원 6명 + 서울대 총학생회장 심재철 = 24명’이라는 신군부의 김대중내란음모사건 그림에 상당한 자료를 제공한 셈이다. 이해찬씨는 6.26. 1회 진술서부터 107쪽 분량에 걸쳐 나중 공소사실이 된 모든 혐의를 진술했다. 이해찬씨는 3월말부터 5.17.까지 민청협 상임위원장 이○범을 16회 만나는 등 국민연합 상임위원장 문○환, 국민연합 집행위원 겸 민청협 회장 조○우를 4-5회 만나 복학생을 통한 재학생 가두시위의 사주, 4.19와 같은 유혈사태 불사하고 이후 국민연합의 사태수습 단계를 거쳐 김대중대통령 옹립 등을 진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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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 선후배 101명을 표로 만들어 진술한 이해찬씨     ©e시사우리신문 편집국

이해찬씨는 1심 5차 공판에서 이같은 공소사실 대부분을 시인해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후 재판이 진행되면서 이해찬씨는 ‘5.10. 학교에서 본 의원을 만나 대규모 학생시위로 4.19.와 같은 유혈사태를 각오하고 정권교체를 해야 한다’고 진술한 내용을 부인했다. 하지만 검찰이 이해찬씨 운동권 친구를 법정에서 증인으로 내세우자 그제서야 재판정에서 심재철을 만나지 않았다는 재판 진술이 거짓이었음을 시인하고 재판장에게 사과까지 한 사실이 언론에 2회 보도되었다.

 

이해찬씨 주요 진술은 아래와 같다.

 

-80.1. 초순 14:00 서○석, 정○화, 심○권 등과 정○화의 안내로 김영삼댁을 방문하고(000384쪽) 1.26. 심○권, 서○석과 함께 김대중씨 집을 방문했습니다.(000390쪽)

 

 
-4.9. 이○범에게 김상진열사 추도식 후 교내시위를 유도하려고 한다고 하니까 이○범도 교내시위로 유도하는게 좋다고 말하였습니다.(000402쪽) 

 

 
-4.10. 박○규와 본인이 학생회장을 만나서 현재까지의 준비사항을 듣고 복학생이 추도사, 추도시, 복학생 환영사를 써주기로 하고 추도시와 추도사는 김○환, 김○연이 쓰고 복학생 답사는 이○이 쓰기로 결정하였습니다.(000403~000404쪽)

 

 
-4.11. 추도식 도중에 이○범이 써준 추도사를 박○옥에게 손질시켜 채○석에게 갖다주고 낭독해달라고 부탁하여 채○석이 낭독하였는데 내용 중에 계엄령해제, 유신잔당퇴진 등이 들어있었습니다. 대회 진행을 맡은 대의원의장 유시민(경제과 4년)이 추도식이 끝난 후 즉시 해산시키고 일부는 스쿨버스를 타고 농대로 출발하여 교내시위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000404쪽)

 

 
-4.12. 이○범은 모든 학교 내 행사를 계엄해제, 유신잔당퇴진, 전두환퇴진 등으로 이슈를 유도하고 그 방법으로는 횃불시위, 단식농성, 화형식 등이 좋겠다고 말하였습니다.(0004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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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철 의원     ©e시사우리신문 편집국


-4.14. 김○곤의 주선으로 ‘김○곤, 황○성, 원○영, 장○철, 김○택, 양○승, 안○로, 이○동, 박○성현, 유기홍, 김명인, 심재철’을 만나 중국집으로 자리를 옮겨 서로 인사를 나누고 금년도 학생운동에 관해 논의하면서 병역집체훈련거부는 국민들에게 나쁜 인상을 줄 것이니 재고하도록 하고 계엄령해제, 개헌문제등을 주장, 토의할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도록 학교 내 민주의 벽을 활용하라고 주장하였습니다.(000406쪽)

 

 
-4.19. 심○권(국민연합 홍보국장)에게 국민연합에서 계엄령해제, 언론자유 등을 주장하는 성명을 내주기 바란다고 부탁하였으며, 이○범으로부터 그동안 학원 내의 노력이 성공적이니 곧 농성, 시위 등으로 유도하라는 애기를 듣고 나오면서 이○범으로부터 현금 5만원을 받았습니다.(000407쪽)

 

 
-4.17 윤○봉한테서 조선대학교 학내 농성애기를 들었습니다.(000408쪽)

 

 
-4.25. 박○섭을 만나 5월 1일까지 병영집체훈련거부를 저지해야한다고 말하니까 박○섭이 말하기를 박○옥이 써클연합 중심으로 5월 1일에 교내시위를 하려고 한다는 애기를 듣고, 그렇게 하는 편이 낫겠다고 말하고 박○옥을 만나러 찾았으나 못찾았습니다.(000412쪽)

 

 
-4.30. 본인이 서울대 병영집체훈련 문제가 어렵게 되어가고 있어 시위를 교외로 유도하기가 어렵다고 보고하자 이○범은 총학생회장의 불신임안을 내어 동인을 위협하고 전 복학생을 동원하여 교외시위를 유도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000415쪽)

 

 
-5.1. 성토대회를 시작하였는데 사회는 박○섭이 맡고 전체시국상황은 본인이 했으며 김○겸이 성토를 하였고 김○인이 결의문을 낭독하고 성토대회 종료 후 사회자 박○섭의 제의로 10여명씩 스크럼을 짜고 1000여명이 교문 앞까지 시위를 하여 이원적집정부제 철회, 신현확 퇴진을 구호로 외쳤으며…(중략)…김○헌의 사회로 병영집체거부에 대한 찬반투표 토론에서 본인은 병영집체훈련에 참여해야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000417쪽)

 

 
-5.2. 12000명이 집합하여 민주화대행진이 시작되어 성토대회를 한 다음…(중략)…심재철은 5.14.까지 계엄령을 해제하지 않으면 계엄해제를 위해 가두에 진출하여 18:00 영등포로타리에 집결하여 시위할 것이며 만약 불시에 학교가 휴교되면 휴교령이 내린 다음날 18:00 영등포 로타리에 모여 시위한다고 발표하였습니다.(000419쪽)

 

 
-5.4. 이○범은 서울대가 선도적으로 민주화투쟁을 수행하고 각 대학 복학생들과 연락을 긴밀히 하며 전국대학이 한 덩어리 민주화투쟁을 하도록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000420쪽)

 

 
-5.8. 애천에서 이○범, 조○우, 이○준, 문○주, 박○동 등을 만나 민청협 확대간부회의를 열어 학생시위관계 논의 끝에 그 행동으로서 조○우로부터 ‘조속한 시일안에 대규모 가두시위를 하여 정부를 타도하고, 각 대학은 광화문에 집결하며, 경찰저지선 돌파를 위해 각목, 화염병, 돌맹이를 준비하고, 경찰은 요즘 사기가 저하되어 있으므로 투석만 하면 얼마든지 뚤릴 것이며, 충돌과정에서 부상자가 생기면, 일반시민이 합세하여 4.19와 같은 사태가 벌어진다. 그러면 중앙청을 비롯한 주요시설을 점령하는데 이때 학생들의 희생이 있을 것이므로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는 등을 지시받았고’.(000421~000423쪽)(註: 이 애천모임은 4일 뒤 5.12. 북악파크호텔에서 열린 김대중씨와 국민연합 등 측근모임에서 민청협회원인 심○권, 장○표에 의해 보고되고 김대중씨 등이 이에 찬성의사를 보였다며 이는 내란모의의 핵심적 증거로 유죄판결에 인용된다. 이 북악파크 모임은 5.27. 김대중씨의 홍보담당 한○헌 씨에 의해 최초 자백 진술되었는데 이때에는 복학생들의 이름이 구체화되지 않았으나 유시민씨의 6.11. 진술 중 “”민청협“ 회장이고 김대중과 관계있는 것으로 알려진 이해찬”이란 구절이 신군부에게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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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은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진실을 알권리가 있다.     ©e시사우리신문 편집국


-5.10. 16:00 사회학과 여사무원에게 정○현이 갖다놓은 ‘전 대학이 궐기하여 유신잔당을 깨부수자’라는 내용의 이○범 초안의 유인물 40부를 받아 사회학과 강의실에 살포했다.(000425쪽)

 

 
-5.14. 영등포 로타리 가두시위에 참가하여 15:00까지 있다가 일부 학생이 여의도를 경유하여 서울역으로 가는 것을 보고 택시를 타고 광화문 모출판사에 올라가서 광화문에서 하는 시위를 구경하다가 19:00 등과 함께 저녁을 먹고 21:00경 큰 누나집으로 귀가하였습니다.(000428쪽)

 

 
-5.15. 14일 가두시위를 평가하는데 공통된 의사는 시민들 반응이 나쁘고 교통장애가 심하여 운전수들 불평이 심하여 우리들이 왜 데모하는지를 잘 모르더라 따라서 15일까지만 가두시위를 하고 일단 중지하는게 좋다였으며 본인은 17:00경 서울역 앞에 도착하여 서울대 데모 군중 속에 약 30분간 참여하고 17:30경 신신백화점 옆 다방으로 가서 사이다를 마시고 전철 편으로 누나집으로 갔습니다. 학생들 가두시위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주모자들에 대한 검거가 있을지 몰라 본인의 집으로는 가지 않았습니다.(000429쪽)

 

 
-5.16. (경양식집 애천에서)박○동이 데모할 때 빈손으로 나가니까 너무 두들겨 맞으니 각목이나 화염병을 준비해냐가야 한다, 고대생들이 5.15. 시내로 진출하면서 성북경찰서에 찾아가 5.14. 연행되었던 학생들 석방요구를 하여 석방되었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였으며(000433쪽)

 

 
-5.17. 본인이 각 대학간의 연결을 원활히 하고 일정 등을 조절하도록 대학연합기구를 구성하는게 좋겠다고 설명하면서 서울대의 경우 학생회하고 복학생들의 의사결정이 서로 틀릴 때가 있다고 말하니 설○은 고대는 복학생과 학생회의 마찰이 별로 없다고 말하면서 기구가 필요없다고 하니까 성균관대의 김○대도 설○의 견해에 동조하였으며 조○우가 각 대학과 국민연합이 공동으로 보다 강력하게 투쟁하는게 좋겠다고 말하기에.(000434쪽) 서울대에는 김대중을 비난하는 벽보가 붙고 있는 실정이라고 하자 조○우가 다른 대학은 그런 소리가 없는데 서울대에서만 왜 그러냐고 하면서.(000435쪽) 국민연합의 민주화촉진국민대회 선언문을 내보이면서 국민연합에서 국민총동원령을 선언했다. 5.20. 혹은 5.22. 정오를 기해 서울에서는 장충단 공원 지방에서는 시청 앞에 모이기로 되어있고.(000437쪽) 이대에서 열리고 있는 전국학생회장단에 국민연합의 행동지침을 전달하여 그 일자에 맞추도록 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000437쪽) 김○대가 이화여대에 간다고 하기에 심재철을 만나 5.20.로 조정하는게 좋다고 말을 하라고 부탁하였는데 김○대가 3시간 후 돌아와 전혀 조정을 못하고 있으며 5.26., 5.30 제안까지 나와 있다고 하기에 설○(고대), 김○대(성대), 최○순(이대) 본인(서울대)이 09:00 이대에 도착하여.(000441쪽) 이○동(서울대 학생회 활동위원장)을 만나 5.20.로 조정해보라고 하고 학교로 돌아왔습니다.(000442쪽) 학교로 돌아와 5.19.일에 사용할 준비작업을 시작하기로 하고 김○곤은 연○만에게 피케트용 각목과 유인물을 준비토록 했는데 각목은 피케트로 사용하다가 경찰과 충돌하면 방어, 공격하는데 사용할 예정이었으며 본인은 12:00경 이○영한테서 국민연합 총동원령이 확정되어 (5.20. 12:00 시청앞) 학생회로 연락왔다는 애기를 들었으며 유인물은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다시 찍고 있었습니다. 국민연합이 5.20.을 기해 ‘국민연합총동원령’을 내린 것은 학생과 경찰, 군인이 충돌하면 폭력사태가 야기되고 이로 인해 시청 등 관공서를 점령하여 정부기관의 기능을 마비시키고 그로 말미암아 정부가 퇴진하는 사태까지 유도하려는 의도로 가진 것으로서 본인도 그에 동조하였습니다.(000443~000444쪽)

 

이와 함께 이해찬씨는 6.27. 2차 진술서부터는 핵심사항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진술했다.

 

-문○환 목사가 학생운동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리라고는 전혀 예상을 못했습니다.(000480쪽)

 

 
-이○범은 폭력적인 방법으로 학생시위를 유도하여 정부 전복을 시도하라고 했으며(000484쪽)

 

 
-조○우와는 4월 하순부터 자주만나 타 대학과의 연결을 시작하여 각 대학이 공동으로 시위할 것을 지시받았습니다. 5.8. 국민연합에서 성명을 냈으니 국민연합과 학교시위 공동투쟁으로 발전되기 시작했으며 교외로 시위를 유도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000486쪽)

 

 
-조○우는 김대중을 정점으로 하는 국민연합과의 공동투쟁을 주장하였으나 본인은 학생운동이 정치세력과 연결되면 학생운동의 순수성이 상실된다고 하면서 약간의 거리를 두자로 이의를 제기하였으며.(000487쪽) 조○우는 김대중을 적극지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므로 본인은 약간 우려하였습니다. 계엄확대실시이후로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정부를 전복해야한다는 지시를 5.18., 5.20., 5.20. 3회에 걸쳐 받았으며 본인도 이에 동조하였습니다.(000488쪽)

 

 
-주로 이○범의 지시를 받고 4,5차례 조○우의 지시를 받았으며 조○우를 통해 타 대학과의 연합을 하였습니다. 모의장소는 주로 서울대 학생회관 라운지이며 박○섭, 심○완, 오○중, 연○만을 통해 주로 지시했으며(000490쪽)

 

 
-5월 들어서 조○우가 자리를 마련한 복학생연합회 모임에서 각 대학이 공동보조를 맞추어 가두로 진출할 것을 부탁했는데 관련자는 조○우(고대), 김○남(한신대), 이○준(중앙대), 이○표(중앙대), 김○대(성균관대), 최○순(이대), 설○(고대), 김○묵(명지대), 송○덕(연대) 등이었으며 5.18.이후에는 위에 열거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폭력적 가두시위로 정부전복을 하려고 획책했습니다.(000492쪽)

 

 
-복학 후에 복학생총회를 수차례 소집하여 같은 복학생인 박○섭, 장○철, 김○곤, 박○운, 김○택, 연○만, 신○만, 오○중, 이○경을 중심으로 학생회에 압력을 가하였는데.(0005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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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은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진실을 알권리가 있다.     ©e시사우리신문 편집국


-복학생총회에 선임된 복학생 대표단은 이○, 채○석, 이해찬, 박○섭, 이○경, 박○호, 서○만, 여○동, 서○태, 박○두, 천○상 등이었습니다.(000516쪽)

 

 
-데모를 주동하는 과정에서 긴밀히 접촉한 인물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우선, 서울대에서는.(000519쪽) 심재철(서울대 총학생회장) 서울대 5년 후배로서 처음만난 것은 4.10. 14:00 김상진 추도식 준비관계로 본인이 학생회의실로 찾아가서 복학생이 도와줄 것을 상의하였으며 그 다음은 4.12.경 김○곤의 주선으로 만났을 때 병영집체훈련 거부를 하지 말고 계엄령 해제, 유신잔당 퇴진 등을 거론하라고 지시했으며 그 다음 직접 만나지는 않고 연○만, 심○완 등을 통해 복학생총회 결의사항을 전달하고.(000525쪽)

 

 
-폭력시위로 정부를 전복하려한 행위를 지나친 것이었음을 반성합니다.(000528쪽)

 

6.29. 합수부 3회 진술에서는 내란모의의 시발이 된 5.8. 애천모임에 대해 다시 상세히 진술해 합수부의 의도대로 5.12. 북악파크 호텔에서 열린 내란모의에 보고된 5.8.애천 모의가 사실임이 입증되어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이 완성되는데 일조하게 되었다.

 

-본인 등은 ‘학생데모의 가열로 시민들의 호응을 받아 4.19처럼 정부공공기관을 장악함으로써 정부가 전복되면 그 수습을 위해 구성될 임시내각으로서는 국민연합이 그 모체를 이루게 될텐데 김대중씨가 현실적으로 대통령에 출마할 수 있는 사람이므로 결국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될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그날 모임도 그런 의도를 갖고 회의가 진행된 것입니다. 이날 가졌던 본인의 생각은 다른 참석자의 생각과 동일하다고 판단됩니다.(000531쪽)

 

 
-4.29. 김홍일씨가 서울대 사회학과로 전화해 광화문 초원다방에서 만나러 가던 중 ‘우연히 강○호를 만나 김홍일씨를 만나러 가는데 같이 가자고 하여 초원다방으로 가서 김홍일씨를 만나 강○호를 소개하고 시국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다른 약속이 있어 저만 혼자 16:40경 먼저 나왔습니다.(0001381~0001383쪽)

 

 
-5.7.경 심○완인가 박○옥인가 불분명한데 양인중의 1명을 만나 서울대 5.6.자 대학신문을 10만부 정도를 더 발행하여 각 대학에 배포토록 지시하였는데 서울대의 데모사실과 요구내용을 다른 대학에 자세히 알리려고 한 것입니다.(0001393쪽)

 

 
-조○우가 소집하는 각 대학 복학생 대표격인 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전 대학의 일정을 조정하려고 노력했는데 참고로 그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001431쪽)

 

 
그 외 

 

 
-5.10. 16:00 학교 도서관 앞에서 총학생회장 심재철을 만나 민청협 간부회의를 5.8.에 실시하였는데…(중략)…국민연합과 대학이 연합하여 반정부 투쟁을 실시하여 가두시위를 가열시켜 시민들의 호응을 받아 정부공공기관을 점거하고 정부가 전복되면 국민연합을 모체로 한 과도임시내각이 구성될텐데 그렇게 하기위해서는 경찰의 저지가 굉장히 강할 것이 예상되므로 학생들은 돌멩이, 각목, 그리고 화염병을 각자 준비하도록 학생회에서 주선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정수 663)

 

이같은 이해찬씨의 진술은 “국민연합의 산하단체가 민청협입니다.(문O환 1심 3차 공판조서, 8.19., 001013)”, “검찰: 민청협과 국민연합의 연락은 주로 누가 하였나요. 문O환: 장O표와 심O권이 주로하고 그전에는 조O우가 했습니다.”(문O환 1심 3차 공판, 8.19, 001014)라는 공판 진술과 함께 모두 유죄로 판결된다.

 

김대중정권 출범 직후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이 재조명되자 이해찬 씨는 1998년 신동아 6월호를 통해 본 의원에 대해 허위사실을 유포한다. 곧 이해찬씨는 심재철보다 뒤늦게 잡혀 심재철의 진술에 꿰맞춰져 혹독하게 고문을 받았다는 허위사실 인터뷰 기사는 사실로 오인되었다. 학생운동권 출신에 현직 국회의원이 한 이 허위 주장은 상당한 전파력을 가졌고 이후 본 의원에 대한 배신자 프레임 덧씌우기의 시작이었다.

 

이해찬씨의 명단 101명과 유시민씨의 명단 77명 중 일부는 타 피고인의 유죄를 입증하는 검찰측 증인으로 활용되어 유시민씨를 비롯해 학생 운동권인사 17명의 이름이 판결문에 증거의 요지로 판시된다.(총 50명이 증거의 요지에 판시) 유시민 리스트에 나온 사람과 이해찬 리스트에 등장한 101명 중 이십 여명은 김대중내란음모사건 판결문 증거의 요지에 판시되었다. 하지만 이 중 5명은 후일 김대중씨의 공천으로 국회의원이 되었다. 검찰측 증인으로 5.8.애천에서 열린 민청협 확대간부회의에서 결의된 ‘4.19같은 유혈사태도 불사한 폭력시위로 정부전복과 김대중 옹립’을 입증한 모 대학 S 총학생회장의 법무사작성의 증인조서는 김대중내란음모사건 학생시위를 사실로 완성시켰지만 그는 동교동에 입문해 김대중씨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이 되었다. 같은 편이면 검찰에 유리한 진술을 했어도 문제가 안되지만 다른 진영이라면 허위사실로 희생양 만들기였던 것이다.

 

국민은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진실을 알권리가 있다.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진실에 대한 판단은 국민의 몫이다.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참된 진실을 위한 공판 속기록, 증거목록, 수사기록 진술서 등 모든 기록은 국민의 알권리에 해당하는 역사의 일부로서 마땅히 공개되어야 한다. 본인은 역사 앞에 서는 각오로 진실을 공개할 것이다.

 

2019. 5. 14. 

국회의원 심 재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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