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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철 의원,합수부 제출된'진술서 전문' 국민께 공개한 이유(?)
기사입력 2019-05-06 21:11   최종편집 경남우리신문
작성자 안기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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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한국당 심재철 의원이 6일 합수부에 제출된  '유시민' 진술서를 공개했다. 

이날 심 의원은 "국민께 진술서를 공개합니다"라는 제목으로 자신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유시민, 심재철 합수부 진술서(PDF) 원본 및 텍스트 파일을 게재하면서 언론에 공개했다.

다음은 "국민께 진술서를 공개합니다"라는 제목의 글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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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철 의원     ©e시사우리신문 편집국

"국민께 진술서를 공개합니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5월 1일 알릴레오 유튜브 방송을 통해 심재철과 유시민의 합수부 진술서 동시공개를 제안했고 나 역시 동의했다. 2011년 5.18민주화운동 기록물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김대중내란음모사건 기록은 지금까지 국민 앞에 공개된 적이 없다. 따라서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재판기록 안에 포함된 합수부 진술서 공개는 국민의 알권리 측면에서도 바람직하다. 그 안에 거론된 학생운동가들의 실명은 굳이 익명처리하지 않았다. 1980년 미완으로 끝났지만 서울의 봄 서울역 광장에 섰던 우리는 당당하고 순수했다. 우리 세대 학우들에게 때 늦은 봄소식을 전하며 이 기록에서 실명 언급된 분들의 너그러운 양해를 바란다. 

 

1988년 5.18광주민주화운동청문회를 앞두고 나는 유시민으로부터 8년 전 치안본부 지하실에서 고문으로 점철된 내 진술서를 건네받았다. 국회청문회를 앞두고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재판자료가 청문위원에게 배포되었는데 이해찬 국회의원의 보좌관으로 막 취업한 유시민은 전체 2만 쪽 자료 중 나의 합수부 진술서만 건네주었다. 고문으로 점철된 나의 고통스런 기록을 그렇게 8년 만에 마주했다. 이후 1995년 전두환 노태우 내란사건 고발인 자격으로 서류를 작성할 때 김대중내란음모사건 피고인들에 대한 검찰의 공소사실 입증증거였던 유시민의 진술서를 구할 수 있었다. 그때 비로소 유시민이 검찰측 참고인이었다는 사실과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유죄 판결의 핵심 증인으로 판결문에 판시되었음을 처음 알았다.

 

 

유시민의 진술서는 전지적 관점에서 관찰자적 시각으로 학우들의 행적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었다. 그의 진술서는 심재철의 공소사실의 핵심 입증 증거로서 활용되었으며 그의 진술서에 내 이름은 모두 78번 언급되었다. 또한 1980년 6월 11일의 유시민 진술로 인해 행적이 소상히 밝혀진 77명 학우 가운데 미체포된 18명은 그의 진술 직후인 6월 17일 지명수배되었다. 그 중 15명은 심재철의 유죄를 입증하는 합수부 진술을 해야만 했다. 유시민의 진술로 故김병곤 선배는 심재철에 관한 합수부 증거이기도 하지만 신군부가 의도한 민청협의 복학생을 통한 재학생 시위 교사의 정황증거가 되어 이해찬 씨에 대한 검찰측 핵심 증거로 판결문에도 인용되었다. 유시민은 당시 운동권 핵심인물이었지만 진술서 제출 이후인 1980.8.20. 아무런 처벌 없이 불기소로 석방되었다. 

 

본 의원의 진술서는 글 중간에 ‘입니다’ 가 ‘다’로 바뀔 정도로 고문으로 흔들렸다. 본인의 진술서는 본인의 행적에 관한 것이 90%였고 다른 사람에 관한 것은 “유시민과 이홍동이 회의에 참석했습니다”와 같이 단순기술 단 1회였다. 본인의 진술서에 등장하는 이름들은 이미 유시민의 진술서로 말미암아 지명 수배된 서울대 단과대학 학생회장 4명에 관한 한 줄의 단순 기술이었거나 혐의와는 상관없는 일반 선배들로서 내 진술로 말미암아 새롭게 지명수배되거나 혐의가 인정된 사람은 없었다. 나는 학생운동의 순수성을 피력하고 김대중 씨 등 정치권의 개입이 없었음을 일관되게 주장했고 이 같은 진술은 공판에서도 유지되었다. 

 

본 의원이 수배 중일 때 5.22. 합수부는 ‘김대중으로부터 심재권의 안내에 따라 심재철이 선거자금 100만원을 받았다’고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중간수사발표를 하였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4.11. 수원 농대에서 열린 故김상진 열사 장례식에 김대중 씨가 참석했을 때 준 조의금 20만원 수표는 총학생회 통장을 거쳐 故김상진 열사 모교인 농대학생회를 통해 추모비 건립과 유족에게 전달된 것이 입증되어서 기소되지 않았다. 김대중 씨와 본인 역시 공판 중 일치되는 진술을 했다. 그 외 본 의원을 제외한 김대중내란음모사건 피고인 전부는 김대중 씨나 측근으로부터 금품을 수수했다는 법정 진술을 했다. 김대중 씨 공소장에 본인의 이름은 없으며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증거목록 103쪽에서 타 피고인의 공소사실 입증 증거나 증인으로 본인의 이름이 기재된 것은 없다. 

 

“검찰: 학생들에 데모를 못하게 하였다는데 김상진 추도식에는 왜 갔었나요.

 

김대중: 민주주의 회복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한 그 정신을 존경합니다. 정치인으로 양심의 가책을 받고 대전에 갔다오던 길에 분향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함석헌씨와 갔다가 그 유족이 있어서 제가 20만원 함선생이 2만원 해서 22만원을 봉투에 넣어서 비서를 시켜서 주었고 분향소에 가보니 학생이 모여있었는데 함석헌 선생을 소개하고 저를 소개하는데 김대중이라고 해서 기분이 나빴는데 조사를 한마디 하고 왔습니다.“(1심 7차 공판조서 001677~1678쪽) 

 

그 자리에서 본인은 김대중 씨에게 발언기회를 주면서 “지금 김대중 씨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결코 우리들이 어느 특정인을 지지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단지 여러 가지 의견들 중의 하나로써 우리들은 받아들여야 한다”고 발언했다. 당시 본인은 타임지 기자인 C.J.Chang과의 회견에서도 ‘기성 정치인들이 불신을 받고 있는 지금 학생이 정치인에게 큰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고 설명했다.(심재철 합수부 진술서 정수 3128~3129) 

 

2016년 4월 총선 투표 하루 전 날 유시민은 본 의원의 지역구인 안양에 왔다. 유시민이 정의당 후보 선거지원을 와서 나에 대한 악담을 하며 낙선운동을 했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나는 유시민에게 개인적으로는 원한을 살 일이 없었다. 그런데 유시민은 나와의 사적인 일화까지 공개해가며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대한 허위사실을 유포했고 그것은 노유정 팟캐스트 방송을 통해 현재까지도 재생되고 있다. 

 

4월 20일과 공영방송을 통해, 그리고 5월 1일에는 유튜브방송 알릴레오를 통해 80년 서울의 봄에 대한 유시민의 왜곡된 허위사실이 전달되었다. 그는 학생회 간부로 공개된 사람들에 관해서만 진술했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복학생 등의 가두시위 독려 등 학생운동권 내부 움직임 등을 진술해 다른 학우들에게는 직접적인 위협의 칼날이 되었다. 그는 ‘진술서 쓰는 동안에는 맞지 않으므로 맞지 않기 위해서 가급적 오랫동안 진술서를 썼다’고 말했다. 이는 고문으로 고초를 당한 민주화운동가들의 희생과 고통에 대한 폄훼이다. 

 

그 자신이 방송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기들끼리 진술서를 받다가 뭐가 나오면 비교를 해요. 서로 정보 공유를 하고. 그러고 ‘야 이 건은 얘가 이런 진술을 했는데 쟤를 좀 족쳐봐’ 그러면 인제 딴 사람 관련된 딴 사람을 족치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들이 유리한 진술을 누군가가 하면 그 진술에 맞춘 진술을 하도록 두들겨 패는거죠,“(KBS-1TV 대화의 희열1, 2019.4.27.)

  

상세한 진술이 당사자들에게는 목을 겨눈 칼로 바뀐다는 것을 이렇게 잘 알면서도 자신의 진술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모른 체 한다는 것인가. 당시 수사관들이 기대하는 이름과 내용이 기술되지 않은 진술의 댓가는 폭력과 고문으로 돌아왔지 않은가. 1980년 5월 17일까지 학내사정을 상세히 서술한 유시민의 진술서로 인해 수사당국은 상세지도를 확보하게 되었다. ‘김대중과 관계있다는 민청협 회장 이해찬’ 진술은 김대중의 사조직 국민연합의 산하단체인 민청협 수사로 방향을 틀게 한 것으로 보이고, 결국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민청협 5명과 관련 복학생 1명은 피고가 되며 민청협이 복학생들을 통해 재학생들의 시위를 사주했다는 밑그림이 완성된다. 유시민의 6.11. 진술서에 발언 등 행적이 상세하게 등장하는 77명 학우 가운데 미체포된 18명이 6.15. 지명수배된 것은 상관없는 일이었는가. 당시 아무리 계엄치하였다 해도 개인에 대한 구체적인 행적에 대한 혐의가 진술되지 않았는데도 막무가내로 지명수배하고 잡아들일 수는 없었다.

 

유시민이 1980년 당시 고문을 견뎌가며 학우들을 지켰는지, 상세한 검찰측 참고인 진술이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그리고 방송을 통해 문장력을 뽐낼 만큼 진술서가 국민 앞에 당당한 내용인지는 이번에 공개되는 진술서 전문을 통해 밝혀질 것이다. 본인의 저서에서 밝힌 대로 피조사자에게 수사국 사무실 청소를 시키는 호의를 베푼 것은 어지간한 협조관계가 아니고서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80년 5월에 계엄사 합수부에 잡혀갔을 때도, 나는 그 ‘티케이의 의리’ 라는 것 덕분에 약간의 '혜택'을 받았다. "경상도 놈이 그런다"고 처음에는 덤으로 주먹질을 하기도 했지만, 부산 출신 국장은 내 진술의 허점을 설렁설렁 넘겨주었고 나중에는 사무실 청소를 하게 하는 등 여러 가지 '호의'(?)를 베풀어 주기도 했다.”(유시민 저「대선 게임의 법칙」 107쪽, 돌베개 출판사, 1997) 

 

유시민의 이름이 알려진 계기가 되었다는 1985년의 ‘항소이유서’가 국민들 상당수에게는 80년 민주화운동의 산물로 오인되고 있다. 최근 KBS-1TV 에 출연한 정치평론가 P씨도 “그러니까 저 항소이유서가 나오고 난 다음에 심재철 당시 학생이 서울대 총학생회장이었거든요. 체포가 됩니다.”(KBS-1TV ‘사사건건’, 2019.5.3.)라고 말할 정도로 국민을 오도한 것은 한 예이다. 유시민의 ‘항소이유서’는 민간인에게 폭력을 가한 1985년 서울대 프락치 사건의 주범으로 유시민이 징역 1년 6개월을 받고나서 썼던 글이다. 항소심에서 형이 줄어 그는 징역 1년의 실형을 살았다. 유시민은 항소이유서에서 80년 당시에 영문도 모른 채 공소취하로 석방되어 48시간만에 군대 강제징집 되었다고 썼지만 실제로는 8월 20일 불기소로 석방되어(80.8.20. 경향신문) 2주 후인 9월 4일 군에 입대했다. 

 

자신의 행적을 거짓으로 미화하는데 거리낌 없는 유시민은 본 의원의 진술서를 공개하라고 했다. 그는 알릴레오에서 ‘80년 당시 심재철이 자수했고 어떻게 형집행정지가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본 의원은 당시 6월 30일 자수했고, 2심 재판 후 피고인 24명 중 7번째로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고 이어 군에 강제징집 되었다. 당시 본인에게는 현상금 백만원과 일계급 특진이 걸려있었고 숨겨 주거나 도피를 도와준 사람도 계엄법과 형법으로 처벌하겠다는 계엄공고가 내걸렸다.(80.6.24. 동아일보) 본 의원의 고향인 광주에서의 당시 참상과 사회 저명인사 97명의 자수명단은 도피하던 나에게 전망의 부재로 느껴졌다.

 

역사 앞에 서는 각오로 유시민 이사장과 본 의원의 진술서를 가감 없이 국민 앞에 공개한다. 유시민은 그의 진술서에서 나를 78번 언급하며 내 공소사실의 90%를 입증해 판결문에 증거의 요지로 판시되었지만 유시민은 불기소로 석방되었다. 본 의원은 수사관의 고문과 협박 속에서도 유시민의 이름을 ‘회의에 참석했다’며 단 한번 거명했다. 누구의 진술이 수사의 가이드라인이 되어 동료들의 목을 조였는지 국민들께서 진술서를 읽어보고 판단하시리라 믿는다. 

 

2019. 5. 6. 

국회의원 심 재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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