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 "조선시대 최고 동․철 산지였다"
창원시 출범1주년 기념 ‘야철제례 학술세미나’서 박동백 창원문화원장 주장
기사입력 2011-07-04 17:06 최종편집 경남우리신문
작성자 신석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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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이 고대부터 철을 생산해 수출했고 세종 때는 일본에서 수입하던 동을 창원 동으로 대체하게 했던 전국 최대의 동․철 생산지였다는 주장이 나와 주목을 받고 있다.창원시는 지난 7월 1일 ‘통합 창원시 제1회 시민의날 기념 전야행사로 개최되는 야철제례의 의미를 짚어보기 위해 마련한 ‘야철제례 학술세미나’에서 박동백 창원문화원장이 주제발표를 통해 “창원이 조선시대 최고 동․철 산지였다”는 주장을 펼쳤다고 4일 밝혔다.
국내외 석학, 박물관련 학자 및 학생, 시민 등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동․철 산지인 창원의 역사적 배경’이라는 주제로 개최된 이번 세미나에서는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최몽룡 교수가 ‘성산패총 발굴의 회고와 전망 그리고 재평가’ ▲일본국립나라문화재연구소 실장과 사카이박물관장을 역임한 일본학자 사또코지 씨가 ‘일본의 고대 철생산에 관한 연구’ ▲창원문화원 박동백 원장이 ‘창원의 동․철 산지의 역사적 고찰’이라는 주제로 각각 발표했으며, 좌장은 조유전 경기도박물관장이, 토론자로는 정기방 창원시 문화체육국장, 고경석 해군충무공리더십센터 연구원, 임영주 마산문화원장, 남재우 창원대 사학과 교수 등이 나서 열띤 토론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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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박동백 창원문화원장은 창원의 동․철의 산지와 관련 있는 지역으로 성산구 불모산동(철), 의창구 북면 구룡산(동), 진해구 웅천 자마산(동), 마산회원구 공설운동장뒤편 이산미산(동) 등을 제시하면서 예부터 창원지역은 동과 철의 산지로 유명했음을 밝혔다.
특히, 《세종실록 지리지》에서 ‘부을무(父乙無)산’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노(爐)의 화력을 높이기 위해 바람일 일으키는 도구인 풀무의 이두식 표기라는 것과 쇳물을 담고 있는 노야(爐冶)의 다른 이름인, 즉 화로를 뜻하는 불못(火池)에서 유래되어 불모산이라 불렀는데 불모(佛母)와 속음이 비슷하여 후에 불모(佛母)산으로 오기된 것이라는 사실을 사료를 들어 밝혔다.
오늘날 ‘불모산’이라는 지명은 지금까지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 왕비 허황옥이 일곱 아들을 입산시켜 승려가 되게 하였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알려지고 있다.
지금도 불모산동에는 무수한 슬래그(slag)와 철광산에 일하던 사람들의 집터가 남아 있다. 옛날 야철 장인들이 살았다는 집터와 집터 주변에 흩어져 있는 슬래그를 다량 수습할 수 있었고, 용광로지로 추정되는 곳이 있지만 가건물이 들어서 있어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노(爐)로 추정되는 유적을 반파하여 건물을 짓고 마당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아직 광석 채취장은 찾지 못했으나 철광석과 사철광석은 지금도 수 없이 수습되고 있다.
또 세종 때 창원의 배사동(背寺洞)에서 양질의 동(銅)이 생산된다고 하였는데 오늘날의 북면 구룡산(九龍山)일대로 구룡산에서 백월산(白月山) 앞으로 뻗은 낮은 산맥으로 이 일대는 무수한 동광이 파여져 있다. 세종 때부터 전국에서 제일 많은 동을 생산하였으며 일본에 의해 1910년 강제합병이 되자 일인들은 이곳에 동광을 개발했고, 1945년 해방이 되자 한국인들에 의해 동광이 채굴되어 1974년까지 이어졌으나 그 후 폐광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박동백 원장은 “이와 같이 창원은 동과 철광이 유명한 고장이지만 그 맥이 끊기고, 유적지가 현존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학술적 연구가 없었기에 일반인들은 이와 같은 광산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으며, 알려지지도 않았다”며 매우 안타까워하면서 “언젠가는 꼭 학술적 연구와 전문적인 발굴을 통해 광산을 문화재로 등록하고, 오늘날 ‘산업의 쌀’로 불리는 철로 선대문화를 이끌어왔던 창원지역 역사를 재조명해 세계적인 공업도시이자 무역도시로 발전하고 있는 통합 창원시의 미래비전을 제시하며, 학생들의 체험학습장으로 활하여 지역문화 발전에 이바지되기를 바란다”는 소망을 피력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