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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刊시사우리]지난 25일 대구향교 이선하 전교,경주향교 정문탁 전교 등 많은 내외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임진란때 혁혁한 공적으로 선무2등 공신에 책록된 최씨일문삼충(崔氏一門三忠)의 한 사람인 최계 선생의 제15대 종통을 계승하는 고유제를 대구 팔공산 자락에 있는 태동선생 별묘에서 지냈다고 밝혔다.
고유제(告由祭)란 문중의 집안에 큰 일 즉 종손의 승계나 혼인 이사 등이 있을때 그 이유의 사실을 사당이나 선조의 묘소에 알리는 제사를 고유제라 하며 길재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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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종손이 종통을 승계할때 선조들에게 고하는 행위는 고유제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정확한 얘법이라고 유림에서는 말하고 있다.
최병호14대 주손의 작고로 극동볼트 최서호 본부장(45세)이 15대 주손으로 종통을 계승했다.
이날 행사는 시도,최수봉 태동종중 회장의 인사,대구향교 이선하 전교의 축사,진설,행례,예필,5대조위 신주 매안으로 진행했다.
최 주손은 "우중에도 종통승계 고유식에 많은 분들이 축하하여 주심에 감사를 드린다"고 인사하면서"15대 주손으로 종통을 이어받은 서호 주손을 중심으로 선조들의 현창사업에 더욱 힘쓰겠다"고 말했다.
대구향교 이선하 전교는"태동공 최계 선생께서는 임짐왜란 당시 나라를 위해 충절울 다하시어 선무원종 2등 공신에 녹훈되고 병조참판에 증직되신 충의의 선현이시다.그 높은 충절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지묘동 삼충사에 모셔져 후손과 지역 유림의 귀감이 되고 있다.특히 태동공 가문의 훌륭한 전통은 충절에만 머무르지 않고 학문과 예학으로 이루졌다"며"태동공의 세 아드님은 모두 한강 정구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으며 차자인 옻골의 입향조이신 대암공 최동집 선생은 효종대왕이 잠저에 있을때 대군사부(大君師傅)을 지냈으며 대암공의 5대손 백불암 선생은 학문과 덕행으로 후세의 존경을 받으시며 대암공에 이어 불천위(不遷位)를 모시고 있다"고 말하면서"이처럼 태동공 가문은 나라에 충성.부모와 선조에 대한 효성.학문을 통한 안격수양을 대대로 실천해온 명문가"라며"오늘의 이 고유제 또한 바로 유교 정신을 실천하는 자리이다"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종손의 자리는 단순히 한 가문의 대를 잇는 자리가 아니라 선조의 제향을 정성껏 받들고 종친의 화합을 이끌며 조상님께서 남기신 정신적 유산을 후세에 전하는 무거운 책무를 맡는 자리"라며"종통을 계승한 최서호 종손은 선대 종손의 뜻을 이어받아 태동공의 충절과 선조들의 학덕을 더욱 밫내 줄것"을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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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의 고유제에서 단연 백미는
'산천을 깨우는 쇠북소리여
천 길 바다보다 깊은 신념으로
먹구름이 강산을 뒤덮으니
붓을 꺾고 일어선 의로운 결단은 존재의 존엄을 드높인 정신
은자의 삶이 시대의 역사가 되고 공산에 깃든 선비의 풍모는
맑고 밝은 조선의 숨결이었다.
태동의 충의는 겨레의 등불'이라고 14세손인 취호당 최재문씨가 '태동 선생의 충의'라고 찬한 시였다.
자는 사훈이고 호가 태동(台洞)인 최계 선생은 1567년 7월21일에 태어나고 1622년 11월10일 56세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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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때에 무과에 합격하여 훈련원 봉사를 지냈고 만경현령과 당상관인 첨지중추부사을 엮임했다.
1596년에는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5개월동안 일본에서 경험한 동사록을 남겼으며 39세때 선무이등공신에 책록됐다.
1597년 정유재란때는 4개도 병사를 징집하여 선조 임금을 호위하며 사열을 잘해 말 한필을 하사받기도 했다.
태동선생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나라의 녹봉을 받든 관속들이 처자식을 데리고 팔공산으로 피신가고 일반사람들도 팔공산으로 피신하는 것을 보고 격문을 돌려 나라를 구하자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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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절절한 호소에 감동을 받은 피신간 사람들과 인근의 많은 사람들이 의병에 참여하였으며 무기도 사비를 들여 만들고 곡간을 열어 의병들의 의식주을 해결하기도 했다.
최계 선생은 초유사 김성일 선생으로부터 대구의병가장(대邱義兵假將)으로 임명 받았다.
가장(假將)은 임진왜란이라는 긴급한 전란속에서 임금으로부터 정식 임명을 받을 시간이 부족할때 왕권을 처리하여 파견된 경상도 초유사(招諭使) 김성일 선생이 관직이나 직함을 임시로 부여한 의병장을 뜻한다.
태동 최계 선생을 대구의병장이라고 부른 것은 임진란 당시 대구에서 자발적으로 의병을 규합했을뿐만 아니라 김성일 초유사로부터 대구의 의병을 이끄는 장수로 공식 사령을 받은 인물임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으로 후대에 부를때는 대구의병장과 사실상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최계 선생이 팔공산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창의할때 심경을 토로한 시는 그의 애국충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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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는 다음과 같다.
도이탐아금수강(島夷貪我錦繡彊)서생투필파검양(書生投필把劍揚)당장일명수방국(當將一命酬邦國)공산여야공존망(公山輿我共存亡)
즉 '섬 오랑캐 우리 금수강산을 탐하니,선비는 붓을 던지고 칼을 들었네,마땅히 한 목숨 나라에 바치리니, 팔공산이여 나와 함께 더불어 생사를 함께하라'는 뜻으로 최계 선생의 비장함을 엿볼 수 있다.
고모부인 공암 이등림(李鄧林)으로부터 사사받았던 태동선생은 43세가 되든 1609년에 모든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서 대대로 내려온 무인가문에서 변무위문(變武爲文)의 가풍을 세우기 위해 문교를 숭상했다.
3자를 둔 태동선생은 전부 한강 정구 선생에게 수학하게 하였으며 3자를 전부 성균관에 입학시켜 자제들을 훌륭하게 키웠다.
2자인 옻골 입향조 대암공 최동집 선생은 대과에 합격하였으나 북인 실세들이 남인이라고 실격처리 하였지만 이후 더욱 학문에 정진한 최동집 선생은 봉림대군 효종 임금의 스승이 됐다.
명나라가 멸망하자 숭정처사로 자처하면서 세상에 나오지 않고 부인동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부인동 향약을 실시하였으며 공의 6대손인 백불암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배츌하기도 한 명문가이다.
이밖에도 많은 후손들이 최계 선생의 뜻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 문화관광체육부 최휘영 장관도 직계 후손이다.
또한 대전유교문화원 원장을 지낸 취호당 최재문 원장은 칼럼리스트,작가,시인으로 지금도 욍성하게 활동하면서 기문을 빛내고 있고,명문가문을 만들기 위해 최계 선생의 변무위문의 법통(法統)을 이어가고 있다.
최언돈 문학박사와 영남매일 사장과 영남실천유교문화진흥원창립준비위원장을 맡고 있는 공학박사 최성덕 등 많은 인재들이 사회 각 분야에서 태동공 최계 선생의 유지를 받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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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동공 문중은 태동공 최계 선생과 옻골 입향조 대암공 최동집 선생,백불암 최흥원 선생 등을 불천위로 모시고 있는데 한 집안에서 이렇게 3분의 불천위를 지내는 것은 보가드문 일이다.
특히 1797년 정사년(丁巳年)에 동해 장기현 현재의 흥해에서 허씨 성을 가진 잡 헛간에 간직해둔 귀신상자라는 해상신협은 역사적인 사건으로 그 속에 담겨져 있는 몇권의 책이 발견됐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200년이 넘어 발견된 이 해상신협에는 한천공 최인,태동공 최계 형제와 종자 우락재 최동보의 임진란의 활약상이 상세히 기록된 일기장 등이 벌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러한 사실을 유림들이 들고 일어나서 한 잡안의 충의가 뛰어나서 빛나는 이는 도내(道內) 대구부(大邱府)의 고(故) 현령 최공의 부자 형제와 같은 이가 없다.
우리들이 청하음은 최씨 일가의 충의 사적이 해상신협에서 발견되었사오니 기이하옵니다 하면서 관찰사에게 진정하고 관찰사는 조정에 알려 한천공 최인은 사헌부 지평,태동공 최계는 병조참판, 종자 우락재 최동보는 호조참판을 증직했다.
이러한 충의로 이들을 일문삼충(一門三忠)이라 하고 있다.
임잔란때 붓을 꺾고 창과 칼을 들고 창의한 의병들과 향약,효자들을 현창하는 영남실천유교문화진흥원 설립을 추진하고 있는 최성덕 박사는 "해상신협의 기적은 반드시 역사 교과서에 등재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