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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刊시사우리]어릴 때 나는 설이나 추석 다음으로 묘사를 지내는 음력 10월을 가장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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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은 일 년 중 가장 신성한 달이라 해서 상달이라고도 한다. 일 년 동안 지은 햇곡식과 과일로 천제를 지내거나 조상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우리와 같이 서양에도 추수 감사절이 있다. 조상 숭배 정신은 동서양이 따로 없다.
상달이 되면 집집마다 조상들의 음덕(陰德)을 기리는 묘사를 지낸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떼를 지어 이산 저산 다니면서 묘사 떡을 얻어먹었던 시절이 엊그제와 같다.
참으로 화살과 같이 빠른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우리 동네는 양 사방이 나지막한 야산 속에 있어 묘소가 많아 묘사 떡을 많이 얻어먹을 수 있는' 딱' 좋은 안성맞춤의 위치에 있었다.
먹을 것이 귀한 어린 시절 묘사 떡은 꿈의 별미였다.
동네 동갑 친구가 15명이나 되었다. 여기에 아래위로 6살을 더하면 엄청난 숫자이다. 이 거대한 부대가 묘사를 지내면 거의 전부 출동한다. 웬만한 문중에서는 제수가 적으면 감당할 수 없었다.
이뿐인가, 머릿수로 묘사 떡을 나누어 주기 때문에 어린아이도 업고 가고 아이처럼 보이기 위해 여자들은 심지어 베개도 업고 갔다.
나는 어릴 때 골목대장이었다.
이 말을 하면 농을 하는 줄 알고 모두 웃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실은 나는 싸움을 잘하는 싸움꾼이었다. 아마도 권투를 했으면 한가락 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16살 이후에는 싸움을 한 일이 없었다. 고향의 한 친구는 사람이 저렇게 변할 줄은 몰랐다고 할 정도로 조용히 살았다.
수캐 뭐(?) 자랑한다고 싸움질도 자랑한다고 팔불출이란 소리 들을까 봐 두렵다.
나의 담당은 몇월 며칟날 어느 골 어느 산소에 뉘 집에서 묘사를 지낸다는 것을 지도를 그려 산소 표기까지 해서 노트에 적어 관리하는 지휘관 역할이었다.
우리 동네에는 인근에 묘소가 많은 문중은 이 씨, 여 씨, 배 씨 등이었다.
공동묘지도 추 천 개나 되었다.
그 당시에는 먹을 것이 귀하고 오징어 다리 하나를 씹는 것이 꿈이었기 때문에 너나 할 것 없이 묘사 떡을 얻으러 갔다.
형편이 어려운 집에서는 제수를 많이 장만하지 못해 사람 수가 많으면 진땀을 흘린다.
갓난아기를 업고 가도 똑같이 주어야 하므로 보자기를 덮어씌운 아기 머리를 보자고도 한다. 그러면 베개를 업고 간 아이들은 아기가 자기 때문에 깨면 안 된다고 둘러대기도 했다.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싱긋이 웃으면서 한 몫을 더 챙겨주기도 했다.
만약에 묘사 떡을 조금만 주고 자기들이 많이 가져가면 “같이 먹고 삽시다. 더 주고 가소”라는 항의가 빗발친다.
만약 이런 항의에도 묵묵부답하고 모른 체하면 반드시 해코지한다. 그다음 해에는 묘지 앞에 경고장을 내건다.
어른들로부터 귀동냥해서 들은 지렁이가 기어가는 듯한 한자로 쓴“적선해야 집안이 잘된다.”라는 적선지가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이라는 깃발을 묘지에 꽂아 놓는 부적이다.
그런데 그 이듬해에도 이 말을 못 알아들으면 행동개시를 한다. 장부에 어느 산, 뉘 집이 묘사를 지내는 것이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미리 가서 묘지 주위에 큰 볼일을 본다. 묘사 떡을 더 얻어먹기 위해 이런 장난도 쳤다.
이를 눈치챈 묘지 후손들은 내년에는 누가 이런 짓을 하지 못하도록 잘 지켜달라고 부탁한다.
조화를 부린 경고장의 덕분에 떡의 크기가 달라진다.
그런데 이런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면 또다시 보복한다.
거지에도 원칙이 있듯이 우리에게도 원칙이 있었다.
거지들은 동냥할 때 절대로 대문을 두드리지 않고 대문 밖에서 깡통을 두드려 동냥하러 왔다는 신호를 보낸다. 하루에 두 번 그 집에 가지 않고, 깡통에 밥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보이면 적게 주기 때문에 깡통을 비우고 간다. 또한, 아무리 얻어먹는 거지라도 땅에 떨어진 음식은 절대로 주워 먹지 않는다.
간혹 잔칫집이 있으면 먼데 있는 거지들에게 연락해서 다 모이게 한다.
그런데 초상이 난 집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
거지와 같이 우리는 좌판이 없는 산소에는 절대로 해코지를 하지 않고, 소처가 어려운 집 산소에는 묘사 떡을 얻으러 가지 않았다.
큰 문중이나 잘사는 집에서 지내는 묘사에만 골라 가고 장난도 쳤다.
손을 보아야 할 산소에는 경고의 표시로 묘사 3일 전에 좌판 위에 큰 볼일을 본다.
이렇게 하는 것은 묘사 때 잘 치울 수 있게 배려하는 차원의 경고장이다.
묘사 때 제관들은 기겁한다. 좌판 위에 누른 황금덩이가 있으면 이것을 치우지 않고서는 묘사를 지낼 수 없기 때문이다.
제관들이 멀리 가서 물을 떠 와서 깨끗이 청소하는 것을 보고 친구들끼리 좋다고 히죽거린다.
이렇게 하면 네 녀석이 이렇게 했지 하고 야단을 치면 정색을 한다.
'어르신 저희가 했으면 무슨 염치로 묘사 떡을 얻으려고 왔겠습니까? 하고 시치미 떼면서 능청을 떤다.
어르신들은 뻔히 알면서도 속아 주신다. 그래 맞다. 너희들이 그렇게 하지는 않은 것이 맞다. 내년부터는 이 짓을 못하도록 묘소를 잘 지켜달라고 하면서 묘사 떡을 더 내어준다.
이렇게 해서라도 묘사 떡을 더 얻고 자기들밖에 모르는 것에 대해 이런 징벌로 고치게도 했다.
그런데 이런 장난에 일부 성씨들은 성질이 난다고 화를 내면서 더 적게 주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하면 우리도 맞불을 놓는다.
속으로 내년을 보자고 하면서 “오늘 묘사 떡을 많이 주어서 고맙습니다”라고 깍듯이 가시가 들어있는 토를 단 인사를 하면서 속으로는 칼을 갈았다.
다음 해에는 묘사 10여 일 전에 볼일을 보고 꼬챙이로 이리저리 저어 물로 씻어도 잘 떨어지지 않게 바짝 말라붙게 해 놓는다. 이렇게 해 놓으면 두손 두발 들고 항복을 한다.
이렇게 해서라도 묘사 떡을 더 얻기 위해 심한 장난을 쳤다.
제주들은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를 생각하면 지금도 미안한 생각이 든다. 이런 심한 장난에도 청개구리 같은 친구들을 자극하면 다음 해에는 더 큰 해코지를 당할까 봐 다독이면서 산소를 잘 지켜달라고 하면서 묘사 떡을 있는 데로 나누어주던 시절이 그립다.
이런 악명이 소문나자 겁을 집어먹은 집안에서는 학교를 파하고 우리가 올 때까지 가지 않고 기다리기도 했다. 나의 친구들은 전부 마라톤 선수들이다. 이산 저산 묘사 떡을 얻어먹기 위해 부지런히 달렸기 때문이다.
이곳저곳에서 얻어온 묘사 떡을 한군데에 만나서 골고루 나누어 먹었다. 분배는 확실히 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꿀맛이었다.
요즘에는 묘사 떡을 얻어먹던 풍속이 사라진 지는 오래되었다. 격세지감을 느낀다. 지금 세대는 묘사 떡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설령 안다고 해도 더럽고 귀신이 붙은 음식이라고 먹기라도 할까?.
그래도 나는 어린 시절 아름다운 추억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절에는 사람 냄새가 나는 시절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립다. 지금 컴퓨터게임밖에 모르는 아이들은 이런 이야기가 호랑이 담배 피우는 소리로 들릴지도 모를 일이다.
아! 내 생애 한 번이라도 그 시절이 다시 온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런 심한 장난을 쳐도 용서하던 인심 좋은 시절이 그립다.
지난 세월을 그리워하는 것은 죽은 자식 뭐(?) 만지는 격으로 다 부질없는 것, 남은 생애라도 신나는 소꿉 시절과 같이 신나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오늘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