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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刊시사우리]죽음은 슬픈 일이다. 직업 특성상 타인의 주검을 목도 하게 되면 고인의 명복을 위해 애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안타까울 때도 많다. 특히 언론보도 등을 통해 학교폭력과 관련된 사망 사건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접하면 마음이 더욱 무겁다. 사망과 관련된 학교폭력은 정말 최악의 상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사망과 관련된 학교폭력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하고 있다.
첫 번째는 辭鋩(말씀 사, 서슬 망)이다. 예리한 칼날보다 더 날카로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말이 아닐까. 칼은 사람의 마음을 벨 수는 없지만, 말은 사람의 마음을 난도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육부에서 발표한 『2023년 1차 학교폭력 실태조사 결과』에서 신체폭력(17.3%)보다 언어폭력(37.1%)의 비중이 압도적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특별한 외상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언어폭력으로 멍들어가는 마음의 상처를 살피지 못하고 피해를 가볍게 취급하는 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그것은 피해자를 辭鋩시켜 死亡의 길로 내모는 경우이기 때문에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
두 번째는 思亡(생각 사, 망할 망)이다. 신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난의 경중을 따지기는 어렵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는 하나, 정신이 피폐해지면 아무리 건강한 신체도 쇠약해질 수밖에 없다. 지금 언급하는 思亡은 첫 번째로 언급한 辭鋩에 의해 발생하는 경우에 해당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너 따위가! 감히 나한테?”라는 표현으로 함축할 수 있을 만큼 상대방을 빈정거리며 무시하는 무언의 행동과 표정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다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이 존경받을 수는 없어도 모든 사람은 존중받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의도적인 무관심인 무시는 단순한 피해망상이 아니라 피해자에게 존재에 대한 회의감을 갖게 하는 적극적인 폭력행위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세 번째는 嗣忘(이을 사, 잊을 망)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모든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해도 과언은 아니다. 관계 속에서 규범과 생활양식을 학습하는 사회화를 통해 갈등과 대립을 해결하고 건전한 문화를 형성하여 사회를 유지·발전시키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계 형성은 인간의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또래집단의 관계는 청소년에게 정서적으로 미치는 영향이 더욱 크다. 하지만 서로를 이어주는 관계 속에서 인위적으로 누군가를 잊히도록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이 우리가 소위 “집단따돌림(15.1%)”이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SNS의 관심과 활용 빈도가 높은 청소년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사이버 따돌림 등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학교폭력의 심각성도 간과 해서는 안 된다.
이제는 앞서 언급한 불미스러운 사망이 아닌 賜望(줄 사, 바랄 망)이 학교에서 많이 발생하길 염원한다. 경험은 했지만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는 복합적이고 양가적인 심리상태에서 학교폭력의 희생양을 찾기보다는 서로에게 희망을 주고 오롯이 추앙할 수 있는 “찐친”을 찾길 청소년에게 애원한다. 그리고 다르기 때문에 혐오하는 증오 사회가 아닌! 다양하기 때문에 협력하는 포용 사회를 만들 수 있도록 모든 구성원에게 관용과 화합을 촉구한다. 관심만으로는 부족하다. 변해야만 하는 시기다. 더이상 지체해서도 안 된다. 변화의 효과는 더디기 때문에...